다국어 문진표를 만들었더니, 환자를 부를 수가 없었다.
문진표도 주의사항처럼 4개 국어로 만들었다. 한국어, 베트남어, 몽골어, 러시아어. 외국인 환자가 자기 언어로 문진표를 쓸 수 있게. 여기까지는 계획대로였다.

만들면서 손이 간 건 오히려 번역 쪽이었다. 의료 문진은 오역이 있으면 안 되니까, AI 번역을 통역사들한테 검수받았다. 문항도 계속 추가됐다. 이런 건 예상한 일이었다.
예상 못 한 건 운영 첫날 터졌다.
러시아어 문진표를 쓴 환자가 이름 칸에 이름을 적었다. 당연히 러시아어로. 키릴 문자로.
접수는 됐다. 데이터도 들어왔다. 근데 대기실에서 환자를 불러야 하는데, 데스크 직원이 그 이름을 읽을 수가 없다. 화면에 떠 있는 글자를 소리 내서 부를 방법이 없는 거다.
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. 자기 언어로 쓰라고 만들어놨으니 자기 글자로 쓴다. 근데 설계할 때 이 생각을 아무도 못 했다. 나도, AI도.
재미있는 건 이 문제의 출신이다. 종이 문진표 시절엔 없던 문제다. 그땐 어차피 한국어 양식이라 외국인 환자가 어떻게든 한글이나 영어로 적었다. 시스템이 좋아져서, 환자가 편해져서, 새로 태어난 문제인 거다.
시스템을 고치면 문제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, 문제의 종류가 바뀐다. 이번에 배운 건 이거였다.
해결은 AI가 했다. 이제 외국어로 적힌 이름 옆에 한글 발음이 자동으로 달린다. 직원은 그냥 읽으면 된다. 물론 완벽한 발음은 아닐 거다. 근데 대기실에서 불렀을 때 본인이 알아듣고 일어나면 충분하다.

설계할 때 다 예상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. 터지면 고친다. 매번 그랬고, 앞으로도 그럴 거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