처음으로, 직원이 먼저 “만들어달라”고 했다.
이게 왜 사건이냐면, 그전까지 열다섯 개는 전부 내가 관찰해서 만든 거였다. 문진표가 이중 입력되는 걸 보고, 실장이 손글씨 쓰는 걸 보고. 만드는 쪽은 항상 나였고, 직원들은 받는 쪽이었다.
이번엔 반대였다. 경영지원실에서 요청이 왔다. 연차관리를 만들어달라고.
요청이 나온 부서가 어딘지 보면 흐름이 보인다. 경영지원실은 대시보드 자동화로 매일 하던 결산 업무가 사라진, 그러니까 이 시스템들의 덕을 제일 크게 본 부서다. 받아본 사람이 다음 걸 청하는 거다.
재미있는 건 요청의 이유였다. 연차관리가 없어서가 아니다. ERP가 있다. 근데 너무 복잡하다고 했다.
연차라는 게 실제론 단순하다. 신청하고, 승인하고, 남은 일수 보이고. 끝이다. 근데 범용 ERP는 온갖 회사를 다 커버해야 하니까, 그 단순한 일에도 메뉴를 몇 번씩 파고들게 만든다. 기능이 많은 것과 쓰기 편한 건 다른 문제다. 우리한테 필요한 만큼만 있는 도구가 제일 편하다. 내가 한 달간 열몇 개를 직접 만든 이유가 사실 전부 이거였다.
뼈대는 하루 만에 만들었다. 신청, 승인, 잔여 일수. 화면 세 개면 되는 일이다.

오래 걸리는 건 그다음이었다. 수습기간 연차는 어떻게 붙는지, 입사 1년 미만은 몇 개 부여되는지, 자동 차감은 언제 되는지. 이건 코딩이 아니라 근로기준법과 병원 내규를 규칙으로 옮기는 작업이다. 만들기는 하루, 다듬기는 진행형. 이 연재에서 계속 반복된 패턴이다.
만들다 보니 일이 커지고 있다. 진료실이랑 데스크는 다음 달 오프표를 미리 짜는데, 오프표랑 연차가 따로 놀면 결국 수기로 대조해야 한다. 그래서 월간 스케줄표까지 붙는 중이다. 관리는 팀장들한테 넘겼다. 내가 다 쥐고 있을 이유가 없다.
지난달까지 나는 혼자 뭐 만드는 원장이었다. 이제 주문이 들어온다. 이 변화가 시스템 하나보다 크다.